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새해 인사가 겸연쩍어질 정도로 시간이 흘렀겠지만. 새해 카운트다운은 잘했어? 난 12월 31일에 혼자 자취방에서 잠들었는데 눈 떠보니 이미 1월 1일이 두 시간 정도 지나있더라고. 휴대폰에 온 몇 개의 새해 인사 말고는 나에게 새로운 해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전혀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올해부터는 새해라고 나이 한 살 더 먹지도 않아서 그런 건지, 예전만큼 설레고 부푸는 마음은 없는 것 같아.
혹시 그런 기분 알아? 시작하는 게 너무 무서워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경계선이 희미한 출발선에 족쇄로 묶여있는 기분 말이야. 견문해 보지 못한 세계는 점점 늘어나고, 가만히 있으면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이가 들어갈 뿐인데, 나는 그 넓은 바깥으로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힘겹게 느껴지기만 해. 나는 내가 정말 즐거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무적의 변명 아래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해보았지. 물론 후회는 없어. 그렇지만 그 일련의 경험들이 전문성도 없고 연속성도 없어서, 세상에서는 그냥 낭비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렇게 어떤 길을 걷다가 여기서는 정착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을 때. 그래서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방향을 틀어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때. 그러나 가끔 내가 발을 처음 내딛고 있는 이 출발선조차 제대로 된 것인지 의문스러울 때. 내가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초조함’이었어.
오늘은, 그 초조하고 두려웠던 수많은 밤들을 이겨낼 수 있게 도움이 되어준 책을 소개할까 해. 바로 박참새의 ‘출발선 뒤의 초조함’이야. 이 책을 왜 샀는지 알겠어? 맞아. 제목 때문이야. 나 사실 너무 초조했거든. 이 책은 김겨울, 이승희, 정지혜, 이슬아 네 명의 여성 창작자가 박참새와 나눈 대담을 엮은 대담집이야. 네 명의 창작자 중 절반은 이름도 모르고 절반은 이름만 겨우 알면서, 사실 이들과의 대담 내용이 그리 궁금하지 않았음에도,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샀다니까. 내가 얼마나 초조했는지 감이 오니 ㅋㅋㅋ.
최근에 널 초조하고 두렵게 했던 건 뭐였어? 나는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었던 것 같아.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실은 남들에게 선뜻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글은 없어.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여줘야 되는 순간에는 진짜 너무너무 무섭고 창피해서 콱 죽어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 가끔 수준 높은, 무척 훌륭한 글을 읽으면 짧은 경탄 뒤 곧바로 몰려오는 좌절감이 나를 덮치곤 했지. 내가 이 경지에 가닿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막막해서 한 줄기 빛조차 없고 파도 소리만 들리는 난바다의 뗏목 위에 있는 기분이 들었거든. 그때, 내게 굵은 줄기의 빛이 되어준 담화가 있어. 궁금하지? 짧게 소개할게.
참새
/ 그런데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창작의 완성은 노출이잖아요. 하지만 세상에 나의 것을 내보이는 일에는 만드는 것과 별개로 엄청난 용기와 대범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를 드러내 보이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겨울
/ 저는 딱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내가 별로라는 인정. (중략)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별로라는 걸 인정하면 발전이 없을 수도 있어요. 더 발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또 공개를 못해서는 안되거든요. 그냥 인정해야 해요. (중략) 지금은 이게 최선이지만,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고 믿는 거죠. 더 잘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이렇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면 조금 더 대범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이런 내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 네가 이렇게 잘하고 싶어서 예민해하는 건 일종의 재능이야.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마음,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 이 감정은 모두 재능이니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어. 다만, 더 대범해지기로 결심한 거지. ‘지금은’ 이게 내 최선이지만, 앞으로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 그럴 수 있다는 믿음. 내게는 그 한 조각의 용기가 필요했던 거야.
이 책, 매끄럽게 다듬어진 대담집이라 물 흐르듯 읽게 되거든.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어? 내가 진짜 잘 읽은 거 맞나?’ 할 수도 있어. 그런데 여기 나온 진솔한 얘기들은 내가 일상을 살면서 수도 없이 ‘나 못해!’ 하고 꼬르륵 물 안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툭, 툭, 튀어 올라서 힘을 주고 다시 사라지더라고 ㅋㅋㅋ.
지난해, 기쁜 일과 슬픈 일, 이룬 일과 닿지 못한 일들, 다 많았겠지만. 짊어진 것이 무거우면 이걸 메고 떠나야 할 여정길이 무서워지잖아. 그럼 결국 출발선 뒤에서 주저하며 멈춰있게 되고.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 다 훌훌 털어버리고 가뿐하게 맞이하는 새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 2024년 새로운 출발선 뒤에 서게 될 여니를 응원하며. 우리, 오래오래 보자!
P.S. 나도 이런 대담집을 만들고 싶어졌어. 내가 언젠가 꼭 너와 나눈 대담을 책으로 엮고 싶다는 생각하는 중. 그러니까 그 대담집을 누군가는 돈 주고 살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멋진 사람이 되자(ㅋㅋㅋ). 종이값 되게 비싸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