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앞에서⟩, 박세미

   일 앞에서 나는 스스로를 인질 삼아 겁박한다. 나는 인질로서 겁에 질린 동물처럼 꼬리를 감추고 눈을 감고 어떤 발언도 삼간다. 이 인질극은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몇 번의 소나기에 흠뻑 젖었고, 몇 번의 폭설에 네 발이 얼었다가 녹았으며, 가끔 발 언저리에 다가와 얼쩡거리는 작은 동물들을 보고 피식 웃기도 했다. 등 뒤의 검은 숲이 맹수를 길러내는 줄도 모르고. 서로를 결박한 손이 얼마나 느슨해졌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일 앞에서 인질범은 자신에게 칼을 겨눴던 이유를 잊었으며, 일 앞에서 인질은 벗어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서로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으므로, 누가 누구를 위협하며, 누가 누구를 구할 것이며, 누가 누구를 ····· 그저 고될 뿐이다.

   검은 숲이 토해낸 검은 그림자들이 낮은 포복으로 다가오는데, 수많은 발이 무력하게 서 있다.

(⟪오늘 사회 발코니⟫, 문학과 지성사)

사람은 모두 살면서 ‘일’을 하게 돼. 그것도 살아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몹시 오래. 인생의 동반자와도 같은 ‘일’이 애인이나 친구가 아니라 인질범이라면 참 끔찍한 일이겠지.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슬프게도 시의 표현처럼 ‘스스로를 인질 삼아 겁박하는’ 존재로서 일을 마주하고 있는 듯해. 단순한 증오나 사랑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얽매임과 애증의 굴레로 말이야.

요즘 나는 새로운 직업을 갖기 위해 취업을 준비 중이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일(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대충 4대보험 적용을 받는 근로자라고 하자)을 쉬고 있어. 어떻게 보면 ‘일 앞에서’ 있지 않고 일 옆에서, 일 뒤에서 있는 격이랄까. 그러나 그런 나도 이 감정을 매일같이 절감하며 지내. 일, 직업…. 끈끈하고 무거운 현실의 공기는 내게 들러붙어 가끔은 내 손을 결박하기도, 숨을 틀어막기도 하지. 스스로를 인질로 삼으면서.

그리고 우리 역시, 저 수많은 발 중 하나일지도 몰라. 일이든 취업 준비든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일을 ‘임무’처럼 여기고, 스스로를 인질로 묶어두곤 하지. 마치 그 일을 완수해야만 내게 자유가 주어질 자격이 있다는 듯이. 그런데 어쩌면 진정한 해방은 일 자체로부터 벗어날 때가 아니라, 일 앞에 묶여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때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일과 나 사이를 다시 정의하는 거야. 인질범과 인질 말고, 다른 관계로.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 알고, 천천히 본인만의 속도로 나아야 해. 그렇다면 일과의 관계가 비극적인 인질극으로만 치부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여유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해. 무게감에 짓눌려 일상의 행복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스스로를 더 보채며 옥죄지 말고, 결박을 느슨하게 풀 수 있도록 말이야. 내게는 레터어리가 그런 존재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연이에게도 레터어리가 그런 공간이었으면 좋겠어. 사실, 우리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연이는 매주 수요일 우리 글을 (그것도 예술, 공상, 망상이 가득한!) 읽어주는 거잖아?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는 이미 그런 역할이지 않을까 (ㅎㅎ) 하는 생각도 드네.

오늘도 레터를 읽어준 연아, 고마워! 일이 어쩌네 아는 척 떠들었지만… 사실 나 잘 몰라 ㅋㅋ. 아는데 매일매일 까먹는 걸지도. 그렇지만 매번 실패하면서도 무한히 다시 다짐할 수 있는 건, 그리고 글로 내 마음을 알맞게 마물러 낼 수 있는 건 다 내 글을 읽어주는 연이 덕분이야. 우리가 무력한 발을 움직여 가게 될 목적지는 모두 다르겠지만, 그리고 가끔은 길을 잃고 헤매겠지만, 그럼에도 숨을 고르는 순간 우리가 함께 하기를 바라. 

P.S. 오늘 소개한 시를 지은 '박세미' 씨는 시인이자, 건축 전문 기자로 활동 중이야. ⟨일 앞에서⟩가 수록된 ⟪오늘 사회 발코니⟫는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나오는 참신한 공간적 주제와 특유의 미니멀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집이지. 오늘은 레터가 길었으니, 다음에 소개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