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캐릭터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유심히 보곤 해. 특히 캐릭터가 서사를 위해 쓰이고 버려지거나 평면적으로 묘사될 때 마음속에서 별점이 반 개씩 깎여나가. 이건 내가 정이 많은 성격이어서가 아니고, 창작자가 게으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나는 살면서 1700개가 넘는 영화를 봤어. 많은 수도 아니지만 결코 적은 수도 아니지. 이만큼 보다 보면 작품 속 인물이나 서사가 큰 틀에서 어느 정도 분류돼. 새로운 소재는 있어도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하잖아? 인류사가 발전하면서 처음 보는 기술, 문화, 장르는 끊임없이 등장하겠지만 결국 이야기의 본질은 비슷해. 인간의 본성과 욕구가 원시 시대나 지금이나 비슷하기 때문이겠지. 중요한 건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하냐의 차이야.

 새로운 걸 보여주겠다는 창작자의 오만은 등장인물을 서사의 부속품으로 전락시켜. 반전, 현란한 영상미, 낯선 자극을 주겠다는 의욕에 묻혀 캐릭터는 납작해지지. 가만히 책상에 앉아 머리만 굴리며 '음, 이번 아이디어 죽이는데?'라고 자화자찬하는 창작자에게 훌륭한 작품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지. 

 반면 작품 속 인물과 상황이 실제 현실처럼 느껴지도록 발로 뛰며 관찰하고 정보를 모으고 자문을 구하는 일은 번거롭고 어려워. 나는 이런 일을 해내는 창작자의 성실함을 높이 사. 최근에 극장에서 본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가 그런 영화였어.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작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재벌 2세와 결혼한 스트리퍼의 좌충우돌 이혼기'야. 막장 드라마 시놉시스 같지만, 실제 스크린에서 관람한 경험은 전혀 달랐어.

 뉴욕의 한 스트립 클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오프닝은 '19금'을 걸고 상영되는 여느 영화와 다를 것 없었지. 하지만 <아노라>는 스트리퍼들이 휴식 시간에 나누는 뒷담화, 퇴직금이나 월차 등 근로 조건을 두고 보스에게 항의하는 장면도 함께 묘사해. 단순히 옷을 벗고 야한 춤을 추는 인물로 등장하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며 자신의 권리를 챙기는 클럽 안 노동자들의 모습을 치열하게 담아낸 거야.

 주인공 '아노라'는 러시아 재벌 2세 '이반'과 눈이 맞아 결혼에 골인하지만, 소식을 들은 이반의 부모님이 부하를 시켜 둘 사이를 갈라놓게 해. 겁에 질린 이반은 도망치고, 아노라와 3명의 부하들은 이반을 찾아 뉴욕 밤거리를 헤매지. 나는 이 시퀀스를 보면서 자꾸 웃음이 터졌어. 보통의 막장 드라마였다면 생략됐을 하룻밤의 소동이 <아노라>에서는 생생하게 그려지거든.

 클럽에서 춤추는 인파 사이로 이반의 사진을 들이밀며 그의 행방을 묻고, 거친 운전에 차멀미하던 한 부하는 토를 하고, 불법 주차된 차를 견인하던 기사와 한바탕 시비가 붙고, 허기진 배를 패스트푸드점에서 달래며 신세 한탄을 하는 네 사람의 모습은 우습고 고달파 보여. 보스를 위해 일하는 단역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서사와 성격을 지닌 캐릭터로 승화된 이들을 보고 있자면 노동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지질하고 애처로운지 눈물과 웃음이 다 나더라니까.

 션 베이커 감독은 전작부터 성노동자나 트렌스젠더, 포르노 배우와 같은 하층민과 소수자에 관한 영화를 찍어왔어. 그들과 만나 정보를 수집하며 숱하게 많은 대화를 나눴겠지. 그들 삶의 실질적인 고민과 모순을 영화에 입체적으로 녹여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을 테고. 디테일에 악마가 있다는 말도 있잖아. 인물의 세세한 감정선을 그려내려는 감독의 노력이 있었기에 <아노라> 속 캐릭터들이 진짜로 뉴욕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이 느껴졌던 거야.

 어떤 영화 속 인물이 판에 박힌 듯 진부한 대사만 치고 뻔한 행동만 보인다면, 이야기가 그저 이야기로만 느껴지고 자극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면 그건 감독의 게으름 때문일 거야.

 그런데 과연 게으른 창작자만 있을까? 나는 게으른 관객도 많다고 생각해.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재생 속도만 이리저리 조절하고 '음, 반전 죽이는데?'라며 겉만 핥는 시청자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작품도 그저 엑기스 영상 모음집에 불과해. 그런 영상에만 익숙해지면 살아있는 이야기를 가져다줘도 그저 불편하게 느껴질 뿐이야.

 만약 유튜브 요약본으로 <아노라>를 봤다면 나는 '웃픈'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거야. 그들의 긴박한 여정에 동승해 희로애락을 경험하지 못했겠지. 엔딩 씬까지 보더라도 아노라의 마지막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전혀 공감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머릿속에는 그저 스트리퍼의 농염한 몸짓과 개차반 같은 이반의 행동거지만이 남았겠지.

 실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잖아. 단면만 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매력도 시간을 들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게 돼. <아노라>의 묘미는 엔딩에 있어. 영화 볼 결심이 선 연이를 위해 작은 비밀로 남겨둘게. 우리 다 보고 같이 이야기 나누자!

 p.s. 상영관 찾는 노하우를 모르는 연이들이 있는 것 같더라. 나는 특정 영화관 어플에서 검색하기보다는 네이버 검색창에 'OOO(영화 제목) 상영관'이라고 검색한 뒤 사는 지역 전체로 설정해서 살펴봐.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와 더불어 각종 독립예술영화관들도 한꺼번에 나오니까 엄청 편하거든. 연이 너도 이 방법으로 상영관을 찾아보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