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말, 한때는 재미없는 어른들의 진부한 얘기였지. 며칠 전 지천명 나이의 직장 상사가 저 말을 하자 순간 아찔해지더라. 무딘 내 화살촉도 어느새 날카롭게 벼려져 시간 축을 가르기 시작했거든. 이제는 부정할 수도 없이 20대 '후반'이 되어버린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어. 반복되는 일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날쌘 시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될 거라고 말이야.

 학생 때는 방학도 종강도 제 발로 굴러들어 오잖아. 얌전히 기다리면 한 해가 알아서 다채로워지는 시절은 사회로 나서는 순간 끝나게 돼. 알찬 여행 계획으로 휴가를 보내도, 멋진 물건으로 방안을 채워도 단조로워진 일상을 숨기기엔 역부족이지. 어느 날 우리는 주름진 눈가를 힘없이 구부리며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지?'

 을사년을 맞이한 연이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있어. 1993년도에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야. 귀여운 제목만큼이나 귀여운 스토리의 이 작품은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 주인공 '필'의 변화를 다뤄. 

 기상캐스터로 일하는 필은 2월 2일 성촉절을 맞아 펜실베이니아의 한 마을로 취재를 떠나. 양력으로는 입춘, 음력으로는 경칩에 해당하는 이날에는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을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져. 불평불만이 많은 필에게는 그저 귀찮은 일거리지만 말이야. 출장에 동행한 방송PD '리타'와 카메라맨 '래리'는 괴팍한 필을 보며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야.

 여느 날처럼 취재를 후딱 끝내고 돌아가려는 필을 막아선 건 폭설이었어. 어쩔 수 없이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하지. 다음 날 눈을 뜬 필에게 찾아온 건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을 내일이었어.

 타임루프에 빠진 필은 이 장르의 전형적인 주인공처럼 호기심 가득한 실험부터 비윤리적인 장난과 극단적인 충동까지 전형적인 행동을 보여. 필의 감정도 즐거움에서 점차 좌절감으로 바뀌지. 현금 수송 차량을 털어 호화판을 벌여도, 미인을 꾀어 잠자리를 가져도, 권총과 투신으로 자살을 기도해도 다음 날이면 다시 펜실베이니아 어느 마을의 숙소 침대 위로 돌아왔으니까.

 비슷한 나날의 연속. 이 저주를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을까? 필은 무수히 많은 날 중 단 하루, 리타와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한 후 마음을 고쳐먹기로 해. 심술부렸던 동네 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문학을 읽고, 피아노를 연습하고, 리타와 계속해서 진심을 나누지.

 우리네 일상도 그렇잖아. 시간은 불가역적이어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분명 다르지만, 나의 태도와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긴 시간도 그저 반복되는 지루함으로 흐릿해질 거야.

 나는 어떤 습관을 만들고 싶을 때 이 말을 사용해. 인공위성을 띄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폭발력으로 추진해야 하지만, 한 번 궤도에 정착하고 나면 자연의 힘으로 알아서 움직이거든. 습관을 막 만들기 시작할 때는 굳은 의지와 운명 신의 가호가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고착된 습관은 적은 힘으로 내 삶을 굴리는 원동력이 돼.

 아주 평범한 어느 날, 저주에서 풀린 필은 리타에게 이렇게 외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이 바로…..내일이에요!" 필이 힘겹게 쏘아 올린 습관이 안정궤도에 도달하는 순간이었어.

 나는 이불 안에서 꼼지락 대며 새해를 맞이했어. 중천에 뜬 태양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지. 그래도 어김없이 신년 계획을 세우며 몇 가지를 다짐했어.

 내 우주선은 안정 궤도에 잘 정착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난 이 습관을 들이기 위해 엄청난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는 사실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관은 언제나 내 앞을 가로막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어제가 오늘이 되지 않도록 말 그대로 ‘힘’을 내는 수밖에! 

 연이 너도 2월 2일이 오기 전에 이 영화를 보고 새해 다짐을 해보길 바라. 다가오는 봄은 분명 보람차고 따뜻할 거야.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