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의 43만 돌파 흥행 소식이 들리는 요즘이야. 추운 날씨 탓에 극장을 잘 가지 않았더니 '꼭 봐야지' 생각만 했던 <서브스턴스>는 어느새 나 빼고 다 본 영화가 됐고, 주변 사람들도 반드시 '극장 경험'을 할 것을 추천하더라고.

  한때는 극장 경험이 지닌 강제성이 좋았어. 그러니까, 이 영화가 좋든 싫든 나는 러닝타임이 끝날 때까지 어두운 암실에서 눈을 화면에 고정한 채 끝까지 앉아 있어야만하는 거야. 졸음이 쏟아지고 허리는 아파와도 영화가 끝나감과 동시에 점차 '끝까지 보길 잘했다'는 희열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어. 지루함을 견디는 맷집을 기르면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영화가 광채를 발하며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돼.

  하지만 맷집이 약해진 탓인지, 그런 집중력을 발휘하는 게 쉽지 않더라. 뭔가를 ‘제대로’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고. 이럴 때 나는 전시를 찾게 돼. 영화처럼 기승전결을 반드시 따라가야 할 필요도 없고, 끝까지 붙잡혀 있어야 한다는 부담도 없어. 내 속도로 걸어 다니며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돼. 얼마나 머무르든, 어떻게 집중하든 제대로 보았다는 것의 기준도 사람마다 다를 테지. 그동안 내가 왜 전시를 좋아하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최근에 전시를 보며 아주 많은 생각을 했고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아. 그래서 오늘 소개할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올해의 작가상 2024》이야. 오늘은 가장 인상 깊었던 양정욱 작가만 소개해 보려고 해.

· 이야기 기계
 원목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물과 조명이 단숨에 눈에 띄었어. 이것이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움직이는 기계라면 어떨 것 같아? 목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계(조각)들은, 알고 보면 모두 이야기이자 사람이야. 작품 하나 하나가 인물과 이야기를 나타내거든.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실재와 허구가 뒤섞여 있는 이야기. 하지만 아주 구체적이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예를 들면 달걀 배달원, 직장 동료, 애완 거북이, 신혼부부의 대화 처럼 구체적인 대상이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전시장에 놓여있는 양정욱 작가의 책자를 통해 그들에 대한 짧은 단상을 접할 수 있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아주 간단한 사례는 '움직임' 이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의 반복된 움직임만큼 삶 그 자체와 맞닿아 있는 것은 없을거야. '이야기 기계'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있는 과거의 이야기, 노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

· 기억하고자 하는 것
  예술 작품이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양정욱의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억하고자 하는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해.

    양정욱 작가는 공사장 인부들이 현장에서 급한 대로 콘크리트 벽에 못으로 전화번호, 메모 따위를 남기는 것을 발견해. 기억하고자 하는 행위가 공사장의 콘크리트 벽을 메모장으로 만들었던 사례를 적용해서 이 작품, <기억하려는 사람의 그림>이 탄생했어. 누군가에게 우리가 겪은 일을 설명할 때, 가끔 전혀 상관없는 사물들을 '그거라고 칠' 때가 있잖아. "이게 그 건물 모퉁이라고 쳐. 그리고 이게 그 고양이라고 쳐." 그럴 때 사물은 모든 것이 될 수 있어. 작가의 작업 <일시적인 약도>는 작업을 마친 후 남은 부산물들을 모아 만든 작품이야.

  내가 양정욱 작가를 더 특별하게 느꼈던 건, 그가 초점을 맞추며 애정하는 대상이 일하는 사람, 특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어.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작가는 생계를 위해 다양한 노동을 많이 경험해 봤다고 해.) 나는 양정욱 작가야말로 노동의 가치,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생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창조성과 반복 노동은 어찌 보면 서로 대척점에 놓인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잖아? 예술가와 노동자의 관계 또한 그렇게 오해되는 경우도 많고. 하지만 창조는 끊임 없는 반복과 차연 사이에서 샘솟는다는 진실이 양정욱의 작품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말하고 나니,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떠오르기도 하네. 공중화장실 청소부의 반복되는 하루를 담은 영화야. 2023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어.)

  때때로 기술과 휴머니즘은 경쟁 구도에 놓이는 경우가 많잖아,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수적인 두 요소를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테마로 한 데 묶어서 표현한 점이 기술과 인간성의 화해와 화합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 기계를 사용하면서도 휴머니즘과 노동에 대한 깊은 애정을 잃지 않는 양정욱의 세계를 살펴보면 마치 전골이나 국물을 삼킨 것처럼 마음이 뜨끈하게 데워지는 느낌이야. 그 뜨끈함이 좋은 건, 세상은 냉소주의보다 온정주의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겠지.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들의 노란 조명, 그리고 물, 바람, 종소리 비슷한 것들을 듣고 있자면 마치 수행자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기도 해.

  이 외에도 윤지영, 권하윤, 제인 진 카이젠 처럼 다채로운 방법론으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이토록 영감을 주는 작가의 세계가 네 가지나 펼쳐져있다는 넉넉함과 포만감은 말로 꺼내기 어려울 정도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전시를 보는데, 마치 오픈 월드 게임을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거야. 이 방식에 옳고 그름은 없어, 차이만 있을 뿐. 서사를 완전히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아. 모든 작품을 다 보지 않는 것도 문제없어. 이토록 개방적이고 유연한 포맷이 현대에 더 부합하는 방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결국, 전시는 정해진 방식 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자유를 경험케 해주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특별해. 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우리는 그 세계를 여행하는 플레이어인 셈이야. 그 여정을 어떻게 채울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이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