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매체야. 스크린을 향해 몇 시간만 집중하면 우주든 전쟁통이든 지구 반대편이든 전부 체험할 수 있거든. 때때로 어떤 작품은 간접 경험을 넘어 공감에 이르게 해. 2025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20대 후반 직장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계 헝가리인의 삶을 이해하게 되지. 물리적 한계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만 공감했던 인간이 기술과 예술의 발전으로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상상하게 된 거야.

 그렇지만 여기엔 약간의 장치가 필요해. 그건 바로 '개별에서 보편으로의 도약'이야. 개개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보편의 정서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무한한 공배수의 콘텐츠를 평생 즐길 수 있을 거야.

 오늘은 타인의 시대에 태어난 연이들이 예술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줄 이 도약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해.

 지난주 토요일에 '최신 고전'이라는 극찬을 받는 <브루탈리스트>를 봤어. 건축가 '라즐로 토스'가 타국에서 핍박받으면서 자신의 예술 이념을 실현하는 이야기였지.

 

 라즐로는 고향 땅에서 인정받는 건축가였어.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그는 콘크리트와 철강 같은 현대적인 자재의 물성을 살려 단순하고 실용적인 건축물을 여럿 만들었지. 실제로 나치는 '비정통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예술'이라며 14년간 운영됐던 바우하우스를 폐쇄하지만, 그 건축 이념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광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라즐로 역시 '브루탈리즘'이라 불리는 모더니즘 건축 양식을 추구하는 인물이야. 미국으로 망명한 후 사업가 '해리슨'의 눈에 띄면서 '브루탈리스트'로서 경력을 잇게 돼.  

 나는 라즐로라는 캐릭터에 깊이 몰입했어. 그에게서 우리 아빠가 걸어온 발자취와 비슷한 점을 발견했거든. 먼지와 책이 켜켜이 쌓인 해리슨의 서재를 훑는 라즐로의 눈빛은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집 한 면에 빼곡히 차 있던 아빠의 책장을 떠올리게 했어. 칼의 노래, 먼 나라 이웃 나라, 태백산맥, 빌 클린턴의 자서전… 헌책방에서 한 무더기의 책을 사오는 날이면 아내와 딸들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오히려 겉표지에 붙은 종이 라벨 흔적을 지우개로 문대며 당신이 얼마나 좋은 조건으로 구한 책인지 딸들에게 설명하곤 했지.

 라즐로가 책장 높이를 가늠하며 자재의 치수를 계산하거나, 커다란 사선 책상 앞에서 손 도면을 그릴 때도 언젠가 앨범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빠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어. 사진 속에는 스무 살의 건축 전공생이 팔토시를 낀 채 제도용 삼각자와 직각자로 도면을 치고 있었지.

 스물두 살의 내가 블루레이용 수납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나. 아빠는 나무의 색과 시간에 따른 변형 정도, 받침대의 폭과 높이를 가늠하더니 수납장을 뚝딱 만들어 왔어. 목공 작업이 깔끔해서 못 자국도 보이지 않는 나만의 가구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아빠에게 받은 삶의 조각과 라즐로의 조각을 이리저리 맞추다 보니 그가 느끼는 감정도 자연스레 전이됐어. 서툰 억양으로 막노동을 전전하는 고단함, 비슷한 처지의 흑인 동료를 대하는 연민, 그리던 아내를 만났지만 관계가 예전 같지 못하다는 당혹감, 해리슨 부자에게 착취당하고 인격마저 침해당하는 모멸감…….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얽매인 나와 라즐로의 삶이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해 연결되는 순간이었지. 

 바야흐로 타인의 시대야. 하드웨어와 인터넷의 발전은 시공간을 초월해 전 세계인을 연결했어. 우리는 서사의 힘을 빌려 물리법칙을 뛰어넘고 타인의 삶에 공감할 수 있게 됐지.

 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자기 자신부터야. 내 마음을 잘 알고, 내 가족이 거쳐온 세월을 듣고, 내 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각기 다른 삶의 조각들을 수집하다 보면 어느새 많은 이들의 이야기에 오감이 트이는 순간을 맞이할 거야. 마찬가지로 내 삶의 고통과 환희에 대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가 자기 일처럼 공감하는 일도 생기겠지.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처럼 지구 곳곳에 흩뿌려진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편의 감정과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마법 같은 일이야. 세상에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 삶이 많은지, 아주 작은 부분만을 이해했는데도 내 삶이 다채로워지더라.

 연이 너도 이 마법을 경험해 봤을까? 답장 남겨줘. 연이 너의 조각은 어떤 모양일지 궁금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