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어리💌] 어느 날 믿음이 죽었다, 주영화의 레터

2025. 3. 19.

어느 날 교황이 죽었어. 둑이 터져 강물이 범람하듯 증오가 넘쳐흘렀지. 카톨릭과 이슬람, 백인과 흑인,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거대한 물결이 거리를 덮쳤어. 연이 네가 추기경 단장으로서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이끌어야 한다면, 심지어 자신의 신앙심을 의심하는 상태라면, 어떤 인물이 세상을 위해 봉사하도록 해야 할까?

<콘클라베>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콘클라베>는 120분 동안 성좌를 건 추기경들의 치열한 의자 놀이를 보여줘. 다른 종교를 물리치고 강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강경파, 매관매직으로 표심을 사는 기회주의자, 이상을 추구한다면서 사욕과 타협하는 위선자 같은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들이 나와. 추기경도 결국 인간인가 봐. 그들의 말과 행동과 태도 중 어느 것 하나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었거든. 시스티나 성당이라는 신성한 공간조차 정쟁의 무대로 격하되는 모습도 새삼스럽지 않았어. 신의 이름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종교의 격이랄 게 없는 시대니까.

<콘클라베>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이전투구의 선거판에서 주인공 '로런스'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 애초에 자기 신앙심이 깊은지도 모르겠고, 교황이 되려는 야망은 더더욱 없었지. '목자로 선택받은 자가 있는가 하면 관리자로서 선택받은 자도 있다'는 선대 교황의 전언을 붙들고 콘클라베를 통솔하는 데 집중할 뿐이야.

주위를 둘러보면 차악의 후보자만 즐비하고 교황이 될 재목은 도통 눈에 띄지 않아. 적당한 선택지를 고르려는 그의 앞에 수수께끼의 인물 '베니테즈'가 등장해. 멕시코인 추기경이자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대주교인 베니테즈는 선대 교황이 남긴 행적 중 하나였지. 로런스는 단서를 추적하는 탐정이자 진실을 좇는 탐구자가 되어 교황 후보자를 하나둘 추리기 시작해.

<콘클라베>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로런스의 탐색은 겸손하기도 하고 오만하기도 해. '혹시 내가 교황이 될 재목은 아닐까?' 라고 의심할 때도 있거든. 떨리는 손으로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고, '주님이며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불러, 마땅히 교황이 될 자가 교황이 되도록 이 표를 행사한다'라고 선서해. 돌아온 대답은 매정했어. 투표하는 순간 성당 꼭대기 유리창이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거든. 사람도, 동물도, 정보도 들어올 수 없는 삼엄한 공간이 참담한 테러 현장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지. 누구보다 가톨릭계의 미래를 생각하는 자신조차 교황의 될 자는 아니었던 걸까? 로런스는 관리자로서 역할을 겸허히 수용하며 제자리로 돌아가지.

<콘클라베>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마침내 성좌에 오른 이는 현재의 가톨릭이 받아들이기에 버거운 인물이었어. 차기 교황의 신체에 얽힌 모순은 로런스를 혼란에 빠트려. 교황이 될 자가 교회에 논쟁거리를 가져올 인물이라면, 그는 과연 '마땅한' 존재일까?

♫•*¨*•.¸¸♪✧

영화는 로런스의 의심을 명쾌하게 해소해 주지 않아. 그는 고민하고 갈등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하지. 간혹 한 줄기 빛 같은 해답이 내려오나 싶다가도, 더 큰 혼돈만 생길 뿐이야. 성직자라는 정체성의 뿌리는 분명 '믿음'일 텐데, 로런스는 의심하는 자로 묘사되고, 그도 자신을 '관리자'로 규정하지.

<콘클라베>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어쩌면 로런스의 이런 모습이 지금 종교계에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죽은 예수와 죽은 성경을 맹목적으로 믿기보다는 신의 의중을 떠보는 자, 무엇이 나은 방향인지 계속 질문하는 자가 이 시대에 필요하지 않을까. 의심을 믿음의 관리자로 내세운다면, 신의 이름으로 폭력의 굴레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겠지.

의심이라는 종교를 믿는 신자는 아마 죽는 순간까지 사바세계를 헤맬 거야. 방랑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멈춰 서는 순간 지극히 평범한 차원으로 떨어지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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